2020년 말부터 시작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와 리플(XRP)의 법적 분쟁은 암호화폐 역사상 가장 주목받은 사건 중 하나다. 그 중심에는 "XRP는 증권인가?"라는 핵심 쟁점이 있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한 기업의 생존 문제를 넘어, 디지털 자산 전반에 대한 규제 방향과 기준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했다. 2024년, SEC가 항소를 포기함으로써 사건은 사실상 종결되었고, 그 법적 의미와 파급력에 대한 분석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본 글에서는 해당 소송의 주요 쟁점, 판결의 해석, 그리고 항소 포기의 법적 함의를 전문적으로 짚어본다.
XRP는 증권인가? 법적 쟁점의 핵심 정리
SEC와 리플의 법정 공방은 디지털 자산이 기존 증권법의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SEC는 리플이 수년간 XRP를 미등록 증권으로 판매하며 투자자 보호 규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리플은 XRP는 전통적인 의미의 증권이 아니며, 유틸리티 기반의 디지털 자산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사건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하위 테스트(Howey Test)'였다. 미국 증권법상 어떤 자산이 증권으로 간주되는지 판단할 때 사용하는 기준으로, ①금전 투자, ②공동 기업, ③타인의 노력에 의존한 수익 기대, ④그 수익이 타인의 경영에 기반한 것인지를 판단한다. SEC는 XRP 투자자들이 수익을 기대했으며, 이는 리플사의 운영에 달려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XRP의 판매 방식에 따라 결과를 달리 해석했다. 특히 리플이 기관투자자에게 직접 판매한 XRP는 '증권'에 가까운 특성을 지녔지만, 일반 투자자에게 암호화폐 거래소를 통해 판매된 XRP는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는 디지털 자산의 판매 맥락에 따라 법적 성격이 달라질 수 있음을 명확히 한 판결이다.
SEC 항소 포기의 의미: 패배인가 전략적 후퇴인가
2023년의 1심 판결 이후, 많은 이들은 SEC가 즉각 항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2024년, SEC는 예상과 달리 항소를 포기했다. 이 결정은 단지 ‘소송 종료’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향후 디지털 자산 규제 체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우선, SEC가 항소를 포기한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리플과의 소송에서의 승산이 불투명해졌다는 점이다. 법원이 XRP의 유통 구조에 따라 증권성을 다르게 본 이상, SEC가 기존의 일괄 규제 모델을 고수하기는 어려웠다. 둘째, 정치적·제도적 부담도 고려 대상이었을 것이다. 미국 의회에서는 이미 암호화폐 규제 프레임워크를 마련하기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며, SEC의 강경한 입장은 의회의 비판을 불러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SEC는 항소를 강행할 경우 법적 판례로서 불리한 선례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연방 대법원까지 갈 경우, 디지털 자산의 정의에 대한 보다 포괄적이고 명시적인 판결이 나올 수 있고, 이는 SEC의 권한을 제한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규제 프레임워크 재정립의 출발점
SEC의 항소 포기는 단순한 패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전체의 디지털 자산 규제 프레임워크 재정립의 출발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규제는 1933년 증권법과 1934년 증권거래법에 기반해 이루어졌으며, 이는 디지털 자산이라는 새로운 자산군을 포괄하기엔 매우 부족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증권이냐 아니냐’라는 단순 이분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분류 체계와 법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 의회에서는 이미 2024년부터 디지털 자산 분류 및 감독 권한 재조정과 관련된 입법안들이 발의되었으며, 리플 판결은 이러한 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SEC의 규제 권한도 제한될 가능성이 크다. 그간 SEC는 ‘규제 명확성 부족’에도 불구하고 무분별하게 소송을 제기해 왔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리플 사건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첫 판례로, 향후 규제 기관 간 권한 조정도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CFTC(상품선물거래위원회)와의 역할 구분, 디지털 자산 감독 전담기구의 신설 논의 등이 활성화되고 있다.
결국 XRP 사건은 단순한 종결이 아닌, 암호화폐 법제화의 첫 단추다. 리플은 이를 발판으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고, SEC 또한 자성을 통해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 투자자, 기업, 규제 기관 모두에게 이번 사건은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를 되묻게 하는 중요한 법적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